
지난 글에서는 지도에서 유난히 구불구불하거나 뾰족하게 튀어나온 행정경계를 따라가 봤다. 이번 글에서는 지도와 현실이 충돌하는 곳을 알아보겠다.
처음에는 누군가 지도를 이상하게 그어놓은 것처럼 보였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그 선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하천이었을 수도 있고, 옛 마을의 경계였을 수도 있다. 산의 능선이나 논두렁, 오래된 도로와 토지의 필지가 경계의 기준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조금 다른 질문을 해보려고 한다.
경계는 그대로인데 주변 세상이 완전히 바뀌면 어떻게 될까?
100년 전 논과 밭 사이에 만들어진 경계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당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왼쪽 논은 A마을이고 오른쪽 논은 B마을이었다.
그 사이에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면 더욱 명확했을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흘렀다.
개울은 복개됐다.
논에는 아파트가 들어섰다.
마을 사이에는 왕복 8차로가 생겼다.
대형마트와 학교가 들어오고 지하철역까지 만들어졌다.
사람들이 바라보는 공간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런데 행정경계는 그대로 남아 있다.
결국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하나의 아파트 단지를 행정경계가 가로지른다.
대형마트 건물과 부지가 두 도시에 걸친다.
현재 하천은 직선으로 흐르는데 행정경계만 옛 물길을 따라 구불구불 움직인다.
우리가 보는 현실의 도시와 지도 속 행정구역이 서로 맞지 않기 시작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이상한 경계 찾기 아홉 번째 이야기.
이번에는 과거에 만들어진 행정경계 위로 현대 도시가 덮였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살펴본다.
아파트를 지었더니 오래된 경계가 단지를 잘라버렸다
행정경계와 현실의 충돌을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장소는 아파트다.
아파트 단지는 하나의 계획에 따라 만들어진다.
같은 이름의 단지,
같은 진입도로,
같은 주차장,
같은 조경시설을 이용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의 아파트 단지는 하나의 행정구역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다.
대표적인 장소가 안양시와 의왕시의 경계에 있는 인덕원 일대다.
2017년 당시 삼성래미안아파트 101동부터 105동까지는 안양시 동안구 평촌동이었지만 106동은 의왕시 포일동이었다.
바로 옆 대우푸르지오도 비슷했다.
1단지는 안양시 평촌동, 2단지는 의왕시 포일동에 속했다.
주민 입장에서는 같은 생활공간이다.
하지만 지도에서 행정경계를 켜는 순간 이야기가 달라진다.
보이지 않는 선 하나가 아파트 사이를 지나간다.
같은 아파트 이름을 사용하면서 주소의 도시가 달라지는 것이다.
더 흥미로운 사례는 인근 대형마트에서도 나타났다.
당시 롯데마트 의왕점의 전체 부지는 1만4,446㎡였는데 그 가운데 3,324㎡가 안양시 평촌동에 속하고 나머지는 의왕시 내손동에 속해 있었다.
건물 역시 약 25%가 안양시에 걸쳐 있었다.
그 결과 일부 지방소득세·주민세·재산세 등은 안양시에 납부하면서 해당 유통시설과 관련된 행정업무는 의왕시가 담당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생각해보면 묘하다.
건물에는 벽이 있다.
도로에는 차선이 있다.
아파트에는 담장과 출입구가 있다.
하지만 행정경계는 그런 시설을 반드시 따라갈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 선이 건물보다 먼저 존재했기 때문이다.
과거 경계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그 자리에 지금의 아파트도, 대형마트도 없었다.
그런데 도시가 확장되면서 기존 행정경계 위에 새로운 도시시설이 만들어졌다.
현실의 공간은 새롭게 설계됐지만 행정구역의 선은 과거의 공간구조를 유지한 것이다.
이 현상은 인덕원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정부가 2016년 인천의 행정구역 경계를 조정하면서 공개한 자료를 보면 단일 아파트나 건물이 두 자치단체로 나뉘거나 하나의 도시개발사업이 두 자치단체에 걸치는 사례가 실제로 존재했다.
인천의 옥골지구와 용현·학익지구 등에서는 도시개발구역과 기존 행정구역이 서로 맞지 않는 문제가 있었고, KT 인천지사 역시 두 자치구에 걸쳐 있어 지방세 신고·납부 등에서 불편이 발생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단순하다.
도시는 새로 만들어졌지만 경계는 옛날 것이다.
그리고 그 두 개의 시간이 같은 지도 위에서 만나는 순간 우리가 보기에는 이상한 경계가 나타난다.
강은 직선이 됐는데 경계선만 옛 물길을 따라간다
건물과 도로만 변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지형도 변한다.
특히 도시를 흐르는 하천은 지난 수십 년 동안 큰 변화를 겪었다.
제방이 만들어지고,
하천이 직선화되고,
둔치가 정비되고,
도로와 체육시설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하천을 따라 만들어졌던 행정경계가 이런 변화와 함께 자동으로 이동하는 것은 아니다.
서울 안양천이 좋은 사례다.
양천구와 영등포구 사이의 안양천 행정경계를 연구한 자료를 보면, 하천지역의 행정경계는 과거 토지조사 당시의 하천 형태를 바탕으로 지적도에 등록됐다.
이후 하천정비사업으로 물길이 직선화되고 제방과 여러 고정시설이 설치되면서 실제 하천의 모습은 달라졌지만 과거 지적도에 남은 행정경계는 계속 유지됐다.
그래서 현재의 지도만 본다면 이상한 모습이 나타날 수 있다.
눈앞의 하천은 곧게 흐른다.
제방도 반듯하다.
자전거도로도 하천을 따라 이어진다.
그런데 행정경계를 겹쳐놓으면 선이 현재 하천과 정확히 맞지 않는다.
이유는 무엇일까?
경계선이 잘못 그어진 것이 아니라 현재 지도와 경계선이 서로 다른 시대의 공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안양천 자체도 도시화 과정에서 크게 변했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하천정비와 제방도로 건설, 목동 시가지 개발과 영등포 일대 아파트 건설 등을 거치며 주변 공간과 하천의 역할이 함께 변화했다.
이 사례는 이번 글의 핵심을 아주 잘 보여준다.
우리는 현재의 모습을 기준으로 지도를 해석한다.
현재 하천이 여기 있으니 경계도 여기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도로가 여기 있으니 경계가 도로를 따라가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행정경계는 반드시 현재의 공간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경계가 만들어진 당시의 공간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현재 지도 한 장만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경계가 과거 지도나 항공사진을 함께 보면 갑자기 이해되기도 한다.
이것이 이번 주제를 지도와 함께 보면 특히 재미있는 이유다.
QGIS 같은 GIS 프로그램을 이용한다면 같은 지역을 시대별로 비교해볼 수 있다.
현재 항공사진을 가장 아래에 놓는다.
그 위에 현재 행정경계를 올린다.
다음으로 과거 항공사진이나 옛 지형도를 불러온다.
마지막으로 하천이나 지적경계를 비교한다.
레이어를 하나씩 켰다 껐다 해보면 현대 도시에서는 아무 의미 없이 휘어진 것처럼 보였던 행정경계가 과거의 하천이나 토지 형태와 맞아떨어지는 순간이 나타날 수 있다.
그 순간 지도의 선은 단순한 경계가 아니다.
사라진 지형을 보여주는 흔적이 된다.
현실과 너무 달라지면 결국 경계도 움직인다
그렇다면 오래전에 만들어진 경계는 아무리 불편해도 그대로 유지해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현실과 경계의 차이가 주민 생활이나 행정에 큰 불편을 만들면 실제로 행정구역을 조정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앞선 글에서도 살펴본 수원시와 용인시의 청명센트레빌이다.
이 아파트는 수원시 영역에 U자 형태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행정구역상 용인시에 속해 있었다.
문제는 실제 생활이었다.
주민들은 더 멀리 떨어진 용인시 행정기관을 이용해야 했고, 초등학생들은 약 200m 떨어진 수원 황곡초등학교를 가까이에 두고도 왕복 8차로를 건너 약 1.1km 떨어진 용인 흥덕초등학교로 통학해야 했다.
결국 2019년 정부는 해당 아파트 지역을 수원시로 조정하고, 대신 수원시의 다른 일부 지역을 용인시로 변경했다.
부산에서도 비슷한 조정이 이뤄졌다.
사상구에 들어선 동원로얄듀크아파트의 진입로 일부가 북구 관할에 속해 있었는데, 정부는 향후 도로관리와 안전·환경정비 등에서 발생할 수 있는 행정 비효율을 줄이기 위해 해당 구간을 사상구 관할로 일원화했다.
최근에는 서울에서도 오래된 경계와 현재 공간을 다시 맞추는 작업이 있었다.
2026년 서대문구가 미등록 토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현저동과 종로구 무악동 사이 통일로 일부 도로가 지적공부에 등록되지 않은 사실이 확인됐다.
관련 법령과 과거 행정구역 변천 자료를 검토한 결과, 1975년 행정구역 조정 이후 약 50년 만에 해당 구간의 정확한 경계가 다시 설정됐다.
종전에는 일부 통일로 구간의 양방향 도로가 모두 종로구에 속했지만 정비 후에는 도로 중앙선을 기준으로 현저동 쪽 도로를 서대문구로 등록했다.
이 사례들을 보면 행정경계가 결코 완전히 고정된 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과거에는 하천이 기준이었을 수 있다.
논과 밭의 경계였을 수도 있다.
작은 마을과 마을 사이의 선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곳에 도시가 들어서면 새로운 기준이 필요해진다.
도로,
아파트 단지,
학교,
상업시설,
도시개발구역,
그리고 주민들의 실제 생활권이 새로운 기준이 된다.
결국 행정경계는 두 개의 시간 사이에서 움직인다.
과거의 공간을 기록하면서 동시에 현재의 생활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글을 준비하면서 가장 해보고 싶은 것은 단순히 현재 행정구역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같은 장소의 지도를 두 장 나란히 놓아보는 것이다.
왼쪽에는 과거 지도를 놓는다.
논과 밭이 있고 작은 하천이 흐른다.
그 위에 당시의 경계가 지나간다.
오른쪽에는 현재 지도를 놓는다.
논은 사라지고 아파트가 들어섰다.
하천은 직선으로 정비됐다.
도로와 상가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같은 위치에 행정경계를 올려본다.
선은 그대로인데 세상만 바뀌어 있다.
바로 이 장면이 이번 글의 핵심이다.
지도는 현재의 공간만 보여주는 도구가 아니다.
어떤 선들은 과거의 공간을 현재까지 끌고 온다.
그래서 도시 한가운데를 이상하게 가로지르는 행정경계를 발견했다면 단순히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라고 생각하고 지나칠 필요가 없다.
현재 항공사진을 끄고,
10년 전,
30년 전,
50년 전 지도를 찾아가 보자.
건물을 하나씩 지우고,
도로를 지우고,
아파트를 지우고,
도시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시간을 거꾸로 돌려본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지금까지 아무 이유 없이 지나가는 것처럼 보였던 경계선 옆에 옛길이 나타날 수도 있다.
작은 하천이 나타날 수도 있다.
논두렁이 나타날 수도 있다.
오래된 마을이 나타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순간 질문의 방향이 바뀐다.
“왜 경계가 현실을 무시하고 지나갈까?”
가 아니라,
“언제부터 현실이 이 경계를 넘어 자라기 시작했을까?”
행정경계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도시가 움직였다.
마을이 커지고,
도로가 놓이고,
하천이 정비되고,
아파트와 상업시설이 들어섰다.
결국 우리가 지도에서 발견하는 이상한 경계는 어쩌면 잘못된 선이라기보다 도시가 성장한 시간을 보여주는 흔적인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의 이상한 경계 찾기.
아홉 번째 이야기는 현재의 지도와 과거의 지도를 겹쳐보며 서로 다른 시대가 하나의 선에서 충돌하는 순간을 찾아봤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펴본 경계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대부분 두 지역을 나누는 선이었다.
A시와 B시.
A구와 B구.
그렇다면 두 개가 아니라 세 개의 행정구역이 정확히 한 점에서 만난다면 어떨까?
산 정상이나 능선, 하천 주변에는 실제로 여러 시·군이 한 점에서 만나는 장소가 있다.
그 점에 정확히 서서 방향을 조금만 바꾸면 전혀 다른 도시가 되는 것이다.
다음 이야기는 ‘한 발짝마다 도시가 바뀐다? — 세 개 이상의 행정구역이 만나는 경계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