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글에서는 강을 따라가는 행정경계를 살펴봤다. 이번 글에서는 산에 의한 행정경계에 대해 알아보겠다.
강은 언뜻 생각하면 지역을 나누기에 가장 명확한 기준처럼 보인다. 하지만 물길은 움직이고, 제방이 만들어지고, 하천이 정비되면서 현재의 강과 오래전에 만들어진 행정경계가 서로 어긋나는 곳이 생긴다.
이번에는 강에서 벗어나 조금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보려고 한다.
산이다.
등산을 하다 보면 정상석에서 흥미로운 장면을 만날 때가 있다.
같은 산인데 등산로 입구에 따라 안내하는 지방자치단체가 다르고, 정상 주변 이정표에는 여러 지역의 이름이 함께 등장한다. 한쪽으로 내려가면 서울이고 반대쪽으로 내려가면 경기도인 산도 있다.
그렇다면 이런 궁금증이 생긴다.
“산 정상에 서 있는 나는 지금 어느 동네에 있는 걸까?”
산은 오래전부터 행정구역을 나누는 자연스러운 기준이었다.
특히 산에서 가장 높은 곳들을 연결하는 능선은 빗물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흘러내리는 분수계가 되기 때문에 마을과 생활권을 구분하기에 좋은 기준이었다. 산 아래에서는 서로 보이지 않는 마을도 능선 위에서는 명확하게 나뉜다.
그래서 오늘날 지도를 확대해 봐도 시·군·구의 경계가 산의 능선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산에는 도로처럼 ‘여기부터 다른 도시입니다’라는 선이 그어져 있지 않다.
등산객은 경계를 의식하지 않은 채 걷는다.
그러다가 정상이나 능선 위에서 스마트폰 지도를 켜면 조금 전까지 걸어왔던 등산로가 사실 여러 도시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대한민국의 이상한 경계 찾기 다섯 번째 이야기.
이번에는 지도에서 경계선을 따라가는 대신 산의 능선을 따라 걸어가 본다.
관악산 정상에 서면 나는 서울일까, 경기도일까?
서울 남쪽에서 가장 익숙한 산 가운데 하나가 관악산이다.
서울시 자료에 따르면 관악산은 높이 약 632m의 화강암 산으로, 서울 관악구·금천구와 경기도 안양시·과천시의 경계에 위치한다. (seoul.go.kr)
산 하나에 네 개의 기초자치단체가 맞닿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관악산으로 올라가는 길도 다양하다.
서울대학교 쪽에서 올라갈 수도 있고, 사당 방향에서 능선을 탈 수도 있다. 경기도 과천향교 쪽에서 연주대로 올라가는 길도 있고 안양 방향에서도 관악산으로 들어갈 수 있다.
출발지는 모두 다르지만 등산객들은 결국 같은 산에서 만난다.
산 아래에서는 서울과 경기도라는 행정구역의 차이가 명확하다.
도로를 따라 이동하다 보면 지자체 안내판도 보이고 주소도 달라진다.
그런데 산으로 올라갈수록 그런 구분은 사라진다.
건물이 사라지고,
도로가 사라지고,
마지막에는 바위와 나무와 능선만 남는다.
하지만 지도 속 행정경계는 여전히 존재한다.
관악산의 대표적인 장소는 연주대다.
과천시는 연주대를 과천시 소재 경기도 자연유산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연주대는 관악산 연주봉의 바위 절벽에 축대를 쌓아 나한전을 조성한 곳이다. (gccity.go.kr)
반면 서울에서도 관악산 정상과 연주대는 대표적인 관악산 명소로 소개된다. 서울시 역시 관악산 정상 연주대를 찾는 등산객들을 대상으로 안전 캠페인을 실시하고 있다. (seoul.go.kr)
그래서 처음 관악산을 찾는 사람에게는 조금 묘하게 느껴질 수 있다.
서울에서 올라왔으니 서울의 산 같기도 하고,
과천에서 올라왔으니 과천의 산 같기도 하다.
안양에서도 올라갈 수 있으니 안양의 산이라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다.
사실 이 질문에는 간단한 답이 있다.
산 전체가 하나의 행정구역에 속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산은 하나지만 행정경계는 그 산의 능선과 골짜기를 따라 여러 방향으로 지나갈 수 있다.
따라서 ‘관악산은 어느 도시의 산인가?’라는 질문보다 더 정확한 질문은 이것일지도 모른다.
“관악산의 어느 지점이 어느 행정구역에 속하는가?”
그리고 바로 이 질문을 하기 시작하면 평범했던 등산 지도가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능선 하나를 따라 네 개 도시가 만나는 청계산
산과 행정경계의 관계를 더 재미있게 보여주는 곳이 있다.
청계산이다.
청계산은 서울 서초구와 경기도 과천시·성남시·의왕시의 경계에 걸쳐 있다. 청계산의 최고봉은 망경대로 약 618m이며 산줄기를 중심으로 여러 도시가 나뉜다. (gagopatour.com)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무려 네 개의 기초자치단체가 만나는 셈이다.
지도를 놓고 보면 그 이유가 보인다.
청계산의 산줄기가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산의 동쪽으로 내려가면 성남 방향이고, 서쪽에는 과천과 의왕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서울 서초구가 이어진다.
도시에서는 행정경계가 복잡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도로를 따라가다가 갑자기 방향을 틀고, 아파트 사이를 지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산에서는 오히려 경계의 이유가 눈에 보인다.
능선이다.
높은 곳을 연결한 산줄기를 기준으로 양쪽의 공간이 자연스럽게 갈린다.
비가 내렸다고 생각하면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능선의 한쪽에 떨어진 빗물은 동쪽 계곡으로 내려간다.
반대쪽에 떨어진 빗물은 서쪽 계곡으로 내려간다.
산 아래에서 보면 하나의 거대한 산이지만 정상 능선 위에서는 서로 다른 생활권이 양쪽으로 갈라지는 것이다.
과천시에서도 관악산 둘레길을 소개하면서 과천·안양·서울의 경계를 따라 이어지는 탐방로라고 설명한다. (gccity.go.kr)
청계산 역시 같은 방식으로 여러 도시의 자연스러운 경계가 된다.
그래서 산 정상이나 능선 주변에서는 여러 지방자치단체의 흔적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등산로 안내판의 지자체 이름,
이정표의 방향,
구조 위치 표지판,
산불조심 안내판,
공원 관리 안내문 등을 살펴보면 같은 산에서도 설치 주체가 달라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정상석도 재미있는 관찰 대상이다.
우리는 정상석을 단순히 ‘정상 인증사진을 찍는 곳’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산에서는 서로 다른 방향에서 설치된 표지석이나 안내시설에 각 지방자치단체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 모습을 보면 산 하나를 여러 지역이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난다.
특히 청계산은 조금 더 재미있는 문제가 있다.
최고봉인 망경대에는 군사시설이 있어 일반적인 등산객이 자유롭게 정상에 올라 인증하는 형태가 아니며, 대신 매봉이 실질적인 정상 역할을 한다. (gagopatour.com)
결국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청계산 정상’조차 어디에서 출발했고 어느 봉우리를 목표로 삼느냐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산 이름은 하나다.
하지만 그 산을 바라보는 도시는 네 곳이다.
이것이 산의 경계가 가진 재미다.
정상석에는 왜 여러 지역의 이름이 등장할까?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해볼 점이 있다.
산에는 왜 이렇게 많은 행정구역이 만날까?
이유를 찾으려면 과거 사람들이 산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산은 주로 등산이나 휴식을 위한 공간이다.
주말이면 정상에 올라가고 전망을 보고 다시 내려온다.
하지만 과거의 산은 지금과 의미가 달랐다.
산은 마을과 마을 사이를 가로막는 거대한 자연장벽이었다.
지금처럼 산을 뚫는 터널도 없었다.
자동차도 없었다.
산을 넘어가기 위해서는 고개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산줄기의 한쪽에는 한 마을이 형성되고 반대쪽에는 다른 마을이 형성됐다.
사람들의 생활권도 산을 기준으로 나뉘었다.
행정구역을 만들 때 이런 지형을 활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지도 위에서 임의로 선을 긋는 것보다 사람들이 이미 경계처럼 사용하고 있던 능선과 고개를 활용하는 것이 훨씬 명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산의 능선을 따라 시·군·구 경계가 이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재미있는 변화가 생겼다.
과거에는 산이 사람들을 나누는 장벽이었다.
지금은 오히려 사람들을 연결하는 공간이 됐다.
서울에서 올라온 등산객과 과천에서 올라온 등산객이 정상에서 만난다.
성남에서 출발한 사람과 의왕에서 올라온 사람이 청계산 능선에서 서로 지나친다.
산 아래에서는 서로 다른 지방자치단체 주민이지만 정상에서는 그 차이를 거의 느낄 수 없다.
오히려 여러 지역에서 올라온 등산객이 같은 정상석 앞에서 줄을 서서 사진을 찍는다.
그래서 정상석에 여러 지방자치단체의 이름이 등장하는 모습은 꽤 상징적이다.
경계를 표시하는 장소가 동시에 여러 지역 사람들이 만나는 장소가 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새로운 재미를 발견할 수 있다.
다음에 산에 올라간다면 정상석 사진만 찍고 내려오지 말고 스마트폰 지도를 한번 확대해보자.
행정경계 표시가 가능하다면 경계선을 켜보는 것도 좋다.
내가 올라온 등산로가 어느 행정구역이었는지,
어느 지점에서 다른 도시로 넘어왔는지,
지금 서 있는 정상은 어느 지역에 속하는지,
능선을 따라 조금 더 걸으면 어느 도시로 넘어가는지 확인해 보는 것이다.
그런 다음 주변 시설물을 살펴본다.
등산 안내판에는 어느 지방자치단체 이름이 적혀 있는가?
산불감시시설은 누가 관리하고 있는가?
구조 위치 표지판에는 어떤 기관의 이름이 있는가?
정상석이나 이정표에는 어느 도시가 표시되어 있는가?
이렇게 산을 바라보면 평범한 등산이 작은 ‘행정경계 탐사’로 바뀐다.
지난 글에서 강을 살펴보며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강은 움직이지만 행정경계는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산은 조금 다르다.
산의 능선은 강의 물길보다 상대적으로 변화가 적다.
그래서 오랜 시간 행정경계의 기준으로 사용하기에 좋은 자연지형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은 완전히 달라졌다.
과거에는 산이 마을과 마을을 갈라놓았다.
오늘날에는 터널과 도로가 산을 통과한다.
지하철과 자동차를 이용하면 반대편 도시로 쉽게 이동할 수 있다.
그리고 주말이면 사람들은 오히려 그 경계를 직접 밟기 위해 산 정상으로 올라간다.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일이다.
우리는 등산하면서 수없이 행정경계를 넘고 있지만 대부분 그 사실을 모른다.
산 아래에서는 ‘서울’, ‘과천’, ‘성남’, ‘의왕’이라는 이름이 중요하지만 정상 능선에서는 그 구분이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눈앞에는 산과 하늘만 있다.
하지만 지도를 켜는 순간 다시 선 하나가 나타난다.
내 왼발은 한 도시에 있고 오른발은 다른 도시에 있을 수도 있는 선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상석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된다.
정상석은 단순히 산의 높이를 알려주는 돌이 아니다.
때로는 여러 도시가 만나는 장소를 알려주는 표식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이상한 경계 찾기.
첫 번째는 아파트에서,
두 번째는 도로에서,
세 번째는 월경지에서,
네 번째는 강에서,
그리고 다섯 번째는 산 정상에서 경계를 찾았다.
이번에는 높은 곳에서 경계를 내려다봤으니 다음에는 다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보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육지가 끝나는 곳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바다로 나가본다.
육지에서는 훨씬 가까운 다른 도시가 있는데도 멀리 떨어진 지자체에 속한 섬, 바로 옆의 섬과 행정구역이 다른 곳도 있다.
지도에서 바다는 하나로 이어져 있지만 그곳에도 보이지 않는 행정경계가 존재한다.
다음 이야기는 ‘섬 하나는 누구의 땅일까? — 바다 위의 이상한 행정구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