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글에서는 하나의 아파트 단지를 가로지르는 행정경계를 찾아봤다.
같은 이름의 아파트에 살고 같은 출입구와 주차장, 놀이터를 이용하면서도 어느 동에 사느냐에 따라 주소와 관할 행정기관이 달라지는 곳이 있었다. 지도 위의 얇은 선 하나가 실제 생활에서는 생각보다 큰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행정경계는 아파트 안에만 숨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번에는 조금 더 밖으로 나가보려고 한다.
이번 글에서는 경계영역을 도로로 확정해본다.
평소 아무 생각 없이 건너는 도로가 두 도시의 경계인 곳이 있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린다.
초록불이 켜지고 길을 건넌다.
걸린 시간은 채 1분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길 건너편에 도착한 순간 내가 서 있는 도시가 바뀐다.
조금 전까지 안양시에 있었다면 지금은 의왕시에 서 있는 식이다.
눈앞의 풍경은 거의 달라지지 않는다. 건물이 갑자기 바뀌는 것도 아니고 도로에 ‘여기부터 다른 도시’라는 선이 그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작은 차이가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버스정류장, 가로등, 안내표지판, 쓰레기봉투, 공공시설.
이번에는 이런 작은 흔적을 따라가며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뉜 도시의 경계를 찾아가 본다.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 안양에서 의왕으로
이번에 살펴볼 곳은 경기도 안양시와 의왕시의 경계다.
특히 인덕원역 주변의 안양시 동안구 평촌동과 의왕시 포일동 일대를 지도에서 확대해 보면 두 도시가 상당히 복잡하게 맞닿아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곳이 흥미로운 이유는 지도에서는 분명 두 도시인데 실제 생활권은 거의 하나처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거 이 지역에서는 행정구역과 생활권이 일치하지 않아 실제 주민 불편으로 이어진 사례도 있었다.
인덕원역 인근 삼성래미안아파트의 경우 6개 동 가운데 101~105동은 안양시 동안구 평촌동, 106동은 의왕시 포일동에 속해 있었다. 인근 대우푸르지오 역시 단지에 따라 안양과 의왕으로 행정구역이 나뉘어 있었다. (yna.co.kr)
지난 글에서 살펴본 ‘한 아파트를 가르는 경계’와 비슷한 모습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선을 아파트가 아니라 도로로 돌려보자.
안양과 의왕이 맞닿는 이 일대에서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행정구역이 달라지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한쪽에서 바라보면 안양이고 반대편으로 건너가면 의왕이다.
그런데 현장에서 그 차이를 알아채기는 쉽지 않다.
안양에서 이어진 보도가 의왕에 들어갔다고 갑자기 끊어지는 것은 아니다. 건물의 모양도 비슷하고 상권도 이어져 있다.
사람들의 움직임에는 더더욱 경계가 없다.
의왕 주민이 인덕원역을 이용해 출근하고 안양 주민이 의왕에 있는 음식점이나 카페를 이용한다. 주민들에게 이곳은 ‘두 개의 도시’라기보다 하나의 생활권에 가깝다.
그렇다면 도시가 바뀌었다는 사실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조금 다른 방법으로 주변을 바라봐야 한다.
건물을 보는 대신 길가의 작은 시설물을 보는 것이다.
도시가 바뀌었다는 흔적은 길가에 숨어 있다
도로 주변에는 생각보다 많은 공공시설물이 있다.
버스정류장, 가로등, 도로표지판, 현수막 게시대, 자전거 거치대, 공원 안내판, 맨홀, 화단, 불법주정차 안내판 등이다.
평소에는 대부분 그냥 지나친다.
하지만 행정경계 위에서는 이런 평범한 시설물들이 상당히 흥미로운 관찰 대상이 된다.
지방자치단체가 각각 설치하거나 관리하는 시설이라면 도시가 바뀌는 지점에서 디자인이나 표기가 달라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도로 한쪽 버스정류장에는 ‘안양시’가 적혀 있고 반대쪽에는 ‘의왕시’가 적혀 있을 수 있다.
버스정보안내기의 형태가 다를 수도 있다.
가로등이나 각종 안내판에 표시된 지자체의 로고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행정경계를 넘는 순간 모든 시설물의 디자인이 일제히 바뀌는 것은 아니다.
도로와 시설마다 관리 주체가 다를 수 있고 설치 시기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직접 확인하는 과정이 재미있다.
‘도로를 건너면 실제로 무엇이 달라질까?’
버스정류장은 어떻게 달라질까?
가로등에는 어느 도시의 이름이 적혀 있을까?
보도블록은 같은 모양일까?
맨홀에는 지자체 이름이 있을까?
불법주정차 단속 안내판에는 어느 도시의 이름이 적혀 있을까?
도로변 화단과 가로수 관리 방식에도 차이가 있을까?
하나씩 사진으로 남겨 비교하면 단순한 지도 이야기가 아니라 작은 현장조사가 된다.
생활 속에서 차이를 더욱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 쓰레기 처리다.
생활폐기물 종량제는 지방자치단체별로 운영되기 때문에 행정구역이 달라지면 사용하는 종량제봉투 역시 달라질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재미있는 장면이다.
도로 한쪽 편의점에서는 안양시 종량제봉투를 판매하고 길 건너편에서는 의왕시 종량제봉투를 판매할 수 있다.
불과 몇십 미터 차이다.
하지만 봉투에 적혀 있는 도시의 이름은 다르다.
행정복지센터도 마찬가지다.
눈앞의 건물은 가까워 보여도 주민등록상 주소에 따라 담당 행정기관이 달라진다.
학교 문제로 넘어가면 경계는 더욱 현실적인 문제가 된다.
인덕원 일대에서도 행정구역과 생활권이 맞지 않으면서 학생들의 통학 문제 등이 제기된 바 있다. (yna.co.kr)
결국 우리가 지도에서 보는 얇은 선은 실제 도시에서는 작은 시설물과 생활방식의 차이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이런 경계를 찾아갈 때는 멀리 볼 필요가 없다.
오히려 발밑을 보는 것이 좋다.
도시는 붙었는데 경계는 그대로 남았다
그렇다면 왜 이런 장소가 생겼을까?
지난 글에서 아파트를 가르는 행정경계를 살펴보면서도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답을 찾으려면 지금의 도시가 아니라 도시가 만들어진 시간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안양과 의왕 일대를 보면 아파트와 상가, 도로가 끊임없이 이어져 있다.
하지만 과거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던 것은 아니다.
현재의 안양·군포·의왕 지역은 과거 더 큰 행정구역 아래 묶여 있던 시기가 있었고 이후 도시가 성장하고 행정구역이 변화하면서 지금의 도시들이 만들어졌다.
행정경계가 만들어진 이후에도 도시는 계속 성장했다.
논과 밭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새로운 도로가 만들어졌다.
지하철역 주변으로 상권이 형성됐다.
서로 떨어져 있던 마을과 도시가 점점 가까워졌고 결국 하나의 생활권처럼 연결되기 시작했다.
도시는 움직였지만 경계는 그 자리에 남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지도에서 보면 이상한 장면이 나타난다.
사람들의 이동에는 아무런 경계가 없는데 지도에는 분명한 선이 있다.
이러한 불일치가 주민들의 생활에 큰 불편을 만들면 실제 행정구역이 조정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수원과 용인의 경계에 있던 청명센트레빌이다.
이곳 주민들은 행정구역상 용인시에 속했지만 실제 생활권은 수원과 훨씬 가까웠다. 특히 아이들이 가까운 수원 지역 학교를 두고 더 먼 용인 지역 학교로 통학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오랜 협의 끝에 2019년 청명센트레빌 일대 약 8만5,961㎡가 용인시에서 수원시로 편입됐고, 반대로 수원시 원천동의 일부 지역이 용인시로 넘어가는 방식으로 경계가 조정됐다. (ajunews.com)
결국 행정경계도 사람들의 생활과 완전히 동떨어져 존재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모든 경계를 생활권에 맞춰 계속 움직이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래서 도시 곳곳에는 여전히 이런 장소가 남아 있다.
한쪽 도로변은 A시.
맞은편은 B시.
같은 상권을 이용하고 같은 역을 이용하지만 주소는 다른 곳.
이런 곳을 직접 걸어보면 지도를 보는 방식도 조금 달라진다.
보통 지도에서는 목적지를 찾는다.
맛집을 검색하고 카페를 검색하고 주차장을 찾는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이상한 경계 찾기’에서는 목적지를 찾지 않는다.
선을 찾는다.
지도에서 이상한 경계선을 하나 발견한 뒤 그 선을 따라 걸어본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그 선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찾아본다.
버스정류장의 로고일 수도 있고,
맨홀에 새겨진 도시 이름일 수도 있고,
쓰레기봉투일 수도 있고,
도로변에 세워진 작은 안내판 하나일 수도 있다.
그렇게 하나씩 찾아가다 보면 지도에서만 존재하던 선이 현실에서도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지난 글에서는 그 선이 아파트 단지 안에 숨어 있었다.
이번에는 도로 위에서 찾았다.
그렇다면 다음 경계는 어디에 있을까?
다음에는 조금 더 이상한 곳으로 가보려고 한다.
한 지역이 다른 지역 속으로 파고들거나, 본래의 행정구역에서 떨어져 다른 지역에 둘러싸여 있는 곳.
지도에서 보면 마치 ‘섬’처럼 떨어져 있는 행정구역이다.
대한민국의 이상한 경계 찾기.
다음에는 지도 속에 숨어 있는 월경지와 위요지를 찾아가 본다.